맨위로가기

아자이 히사마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아자이 히사마사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아자이 씨의 당주였다. 1526년에 태어나 1573년 오다니 성 전투에서 사망했다. 그는 아버지 아자이 스케마사의 뒤를 이어 가독을 상속받았으나, 롯카쿠 가문에 복속되고 군사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아자이 가문의 세력을 약화시켰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내정에서는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국인 영주들을 규합하고 법 제도를 정비하는 등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하는 기반을 다졌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그는 아들 아자이 나가마사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으나, 오다 노부나가의 공격으로 오다니 성이 함락되면서 자결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아자이씨 - 요도도노
    요도도노는 아자이 나가마사와 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 사이에서 태어난 아자이 삼자매의 맏딸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어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낳았으며, 히데요시 사후 히데요리의 후견인으로서 도요토미 가문의 실권을 장악하고 도쿠가와 막부와 대립하다 오사카 전투에서 패배하여 히데요리와 함께 자결한 인물이다.
  • 아자이씨 - 아자이 스케마사
    아자이 스케마사는 센고쿠 시대에 몰락해가던 아자이 가문을 재건하고 북 오미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며 롯카쿠 가문과 대립한 아자이 가문의 당주이다.
  • 1526년 출생 - 라파엘 봄벨리
    라파엘 봄벨리는 이탈리아의 수학자로, 1572년 『대수』에서 복소수 개념을 체계적으로 다루고 허수의 산술 규칙을 명확히 제시하며 삼차방정식 해법에서 복소수가 나타나는 경우를 최초로 지적하는 등 후대 수학 발전에 기여했다.
  • 1526년 출생 - 이양원
    조선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영의정까지 오른 문신 이양원은 뛰어난 행정 능력과 학문적 업적을 인정받았으나,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으로서 서울 수비를 맡았음에도 선조의 파천 소식을 듣고 자결하였다.
  • 시가현의 역사 - 야마우치 가즈토요
    야마우치 가즈토요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한 무장으로,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며 도사국을 얻어 다이묘가 되었고, 고치성을 축조하고 가다랑어 타다키의 유래를 만들었으며 20만 석의 영주가 되었으나 자식 없이 사망했다.
  • 시가현의 역사 - 글리코·모리나가 사건
    1984년부터 1985년까지 일본에서 발생한 글리코·모리나가 사건은 괴도 21면상을 자칭하는 범인들이 글리코 사장 유괴를 시작으로 글리코와 모리나가 제과 등 식품 회사를 협박하며 청산가리를 넣은 과자를 유통시키겠다고 위협한 미해결 기업 협박 사건이다.
아자이 히사마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아자이 히사마사
지묘인 소장
시대센고쿠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출생다이에이 6년(1526년)
사망덴쇼 원년 음력 8월 27일(1573년9월 23일)
아명사루야샤(猿夜叉)
이명신쿠로(新九郎), 유마사(祐政)?
계명규가쿠 료슌(久岳良春)
묘소도쿠쇼지(徳勝寺, 나가하마시 소재)
관위좌병위위, 시모쓰케노카미, 궁내소보
주군교고쿠 다카히로(京極高広), 롯카쿠 요시카타(六角義賢)
씨족오미 아자이 씨(近江浅井氏)
가족 관계
아버지아자이 스케마사(浅井亮政)
어머니게이안 주쇼(馨庵寿松, 아마고씨의 딸)
형제히사마사, 마사히로, 호라야샤(야마시로노카미), 쓰루치요(다야 아키마사 실), 마쓰이치 고료, 의형제: 다야 아키마사
아내오노도노(이노구치 쓰네모토의 딸)
자녀나가마사, 교고쿠 마리아(교고쿠 다카요시의 부인), 양녀: 오미노가타(사이토 요시타쓰의 부인)
기타 정보
가독 상속1542년 ~ 1560년

2. 생애

다이에이 6년(1526년), 아버지 아자이 스케마사와 측실 아마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사루야샤(猿夜叉), 통칭은 신쿠로(新九郎)였다.

덴분 11년(1542년), 아버지 스케마사가 사망하자 17세의 나이로 가독을 상속받았다. 당시 아자이 가문은 주가(主家)였던 교고쿠 씨와의 관계가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히사마사는 가독 상속 직후부터 교고쿠 다카히로와의 대립에 직면했다. 1544년부터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고, 1550년 무렵 양측은 화의를 맺었다.

이후 미나미오미(南近江)의 롯카쿠 씨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덴분 22년(1553년) 지토야마 전투에서 롯카쿠 요시카타에게 패배하고 사실상 그 세력 하에 놓이게 되었다. 아들 겐세이(후의 나가마사)가 요시카타의 이름 한 자(편휘)를 받아 원복하고 롯카쿠 가문의 중신 딸과 혼인하는 등 종속 관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에이로쿠 2년(1559년), 겐세이가 롯카쿠 가문과의 혼인을 파기하면서 롯카쿠 가문과의 관계는 다시 적대적으로 변했다. 이듬해인 에이로쿠 3년(1560년)경, 히사마사는 가독을 아들 나가마사에게 물려주고 오다니성 내의 고마루(小丸)로 은거하였다. 은거 배경에는 롯카쿠 가문에 대한 강경 노선을 주장하는 가신들의 압력이 작용했다는 설과 비교적 원만한 승계였다는 설이 공존한다.

덴쇼 원년(1573년), 오다 노부나가의 침공으로 오다니 성 전투가 발발했다. 히사마사는 고마루 구역을 방어했으나, 8월 27일(다른 설도 있음) 하시바 히데요시 부대에 의해 함락되자 아자이 후쿠주안과 함께 자결하였다. 향년 49세였다. 다음 날 아들 나가마사도 자결하면서 아자이 가문은 멸망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히사마사와 나가마사,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머리뼈에 금칠을 하여 공개했다고 전해진다.

2. 1. 가독 상속

다이에이 6년(1526년), 아버지 아자이 스케마사와 측실인 아마고씨(후에 출가하여 쿄안 쥬쇼)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사루야샤였고, 통칭은 신쿠로였다. 어머니 아마고씨는 히사마사를 26세에 낳았다고 전해진다(『연화회 두령문장』).

아버지 스케마사는 본래 아자이 가문의 서가 출신이었으나, 종가에 데릴사위로 들어갔다. 스케마사와 정실 구라야 사이에는 아들 신시로 마사히로가 있었지만 일찍 사망했다. 이 때문에 스케마사는 구라야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츠루치요의 사위로 타야 아키마사를 맞이했다. 아키마사에게 스케마사 자신의 이름(신산부로)을 물려주어 아자이 신산부로 아키마사라 칭하게 하고, 자신의 뒤를 잇게 할 계획이었다.

덴분 11년(1542년) 1월 6일, 아버지 스케마사가 사망하자 히사마사는 17세의 나이로 가문의 수장 자리인 가독(家督)을 상속받았다. 이 과정에서 히사마사와 아키마사 사이에 가독을 둘러싼 다툼이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스케마사의 유언, 정실 구라야 및 딸 츠루치요와 측실 아마고씨의 관계가 원만했기 때문, 혹은 당시 실력자였던 롯카쿠 사다요리의 영향력 때문에 집안 내 분쟁으로까지 번지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역사가 타카하시 마사아키는 당사자들이 표면적으로는 상황을 받아들였더라도, 각자의 지지 세력 사이에서는 내부적인 갈등이나 암투가 계속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가독 상속을 확고히 한 히사마사는 덴분 13년(1544년) 4월 6일, 토쿠쇼(쇼) 사(寺)에서 아버지 스케마사를 위한 법요를 지냈다.

2. 2. 교고쿠 다카히로와의 전쟁

아자이 씨는 본래 교고쿠 씨의 피관(가신) 가문이었다. 히사마사의 아버지 아자이 스케마사(료세이)는 교고쿠 다카히로의 아버지인 다카키요를 섬기며 미나미오미의 롯카쿠 씨와 대립했다. 그러나 1538년 다카키요가 사망한 후 롯카쿠 씨의 압박이 거세지자, 스케마사는 결국 롯카쿠 사다요리에게 복속하였다.

스케마사의 이러한 결정에 불만을 품은 교고쿠 다카히로는 1541년 스케마사를 상대로 군사를 일으켰다. 히사마사가 가문을 계승한 것은 바로 이러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스케마사의 죽음과 어린 히사마사의 가독 계승을 기회로 본 다카히로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1542년 1월 11일에 구니진 영주에게 영지를 약속하는 등 히사마사를 겨냥한 행동에 나섰다. 마침내 1544년 8월, 히사마사와 다카히로의 군대가 직접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1546년 7월에는 카이즈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히사마사도 직접 출진했다. 이 전투에서 양측을 합쳐 36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전해진다(「스게우라 문서」, 『초메이지 과거장』). 다만, 이 전투의 상대가 구체적으로 누구였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1550년 무렵, 히사마사와 다카히로 사이에 화의가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해의 기록인 『덴분 일기』에서 히사마사의 호칭이 이전의 '신쿠로'에서 '사효에노조'라는 관직명으로 바뀐 것이 확인되는데, 이는 다카히로의 주선으로 관직을 얻었음을 시사하며 양측 간 화의가 이루어졌음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여겨진다.

2. 3. 롯카쿠 가문으로의 복속과 은거

덴분 22년(1553년) 11월, 지토야마 전투에서 롯카쿠 요시카타에게 패배하였다. 이 전투는 덴분 19년(1550년)부터 이어진 오미 남북 간의 싸움에서 롯카쿠 요시카타의 최종 승리를 확정지었다. 패배 후 히사마사는 롯카쿠 가문과 강화 조약을 맺었으나, 이는 사실상 요시카타에게 종속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에이로쿠 2년(1559년), 히사마사의 적남 사루야샤(후의 나가마사)가 원복하여 '겐세이'(賢政, 요시카타의 이름 한 자(편휘)를 받은 것으로 추정)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같은 해, 겐세이는 롯카쿠 가문의 중신 히라이 사다타케의 딸과 혼인했는데, 이는 아자이 가문이 롯카쿠 가문에 종속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조치로 해석된다.

그러나 에이로쿠 2년(1559년) 4월, 겐세이는 아내를 히라이 가문으로 돌려보내며 이혼했다. 이 결정은 롯카쿠 가문과의 대립을 분명히 하는 것이었고, 결국 롯카쿠 요시카타의 오미 북부 침공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에이로쿠 3년(1560년) 10월경, 히사마사는 가독을 아들 겐세이(나가마사)에게 물려주고 은거하였다. 은거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있다. 『에코키』나 『아자이 삼대기』와 같은 기록에서는 롯카쿠 가문에 맞서 싸우기를 원했던 가신들이 젊은 겐세이를 내세워 히사마사를 강제로 은거시켰고, 이 때문에 부자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고 전한다. 어린 겐세이가 독자적으로 이러한 정책 전환을 결정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므로, 가신단 내부의 합의("국중의 일기")에 따른 결과로 추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히사마사는 은거 후에도 '시모노노카미'(下野守)를 칭하며 계속해서 문서를 발급하는 등 활동을 이어갔고, 부자 관계가 특별히 나빴다는 증거는 확인되지 않아, 가독 상속은 비교적 원만하게 이루어졌다는 시각도 있다. 은거 후 히사마사는 오다니성 내의 고마루(小丸)에 머물렀기 때문에 '고마루도노'(小丸殿)라고도 불렸다.

2. 4. 오다니 성 전투

덴쇼 원년(1573년), 오다 노부나가가 이끄는 군대가 아자이 가문의 본거지인 오다니 성을 공격했다(오다니 성 전투).

히사마사는 성의 코마루 구역을 방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8월 27일 밤, 하시바 히데요시가 이끄는 부대가 교고쿠마루를 함락시키면서, 아들 아자이 나가마사가 지키던 혼마루와의 연결이 끊어졌다. 결국 코마루가 먼저 함락되었고, 히사마사는 아자이 후쿠주안과 함께 할복했다. 히사마사를 모시던 무악가(舞樂家) 츠루마츠 다유(鶴松太夫) 역시 그 뒤를 따라 자결했다. 다음 날 나가마사도 자결하면서 아자이 가문은 멸망했다. (『노부나가 공기』) 히사마사의 향년은 49세였다.

히사마사가 자결한 날짜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존재한다. 오타 규이치가 쓴 『노부나가 공기』는 8월 27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 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편이다. 하지만 『호안 노부나가기』, 『소켄기』, 『토다이기』, 『사쿠마 군기』, 『시마 기록』, 『아사쿠라 시말기』, 『이본 연대기 발췌』 등 다수의 기록은 8월 28일로, 『공경보임』, 『나가마사 화상찬』, 『토쿠쇼지 과거장』, 『아자이 가령보』, 『아자이 삼대기』 등은 8월 29일로 기록하고 있어 차이가 있다.

『노부나가 공기』에 따르면, 오다 노부나가는 다음 해 정월에 히사마사와 아자이 나가마사,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머리뼈에 하쿠다미(금칠)를 하여 공개했다고 한다.

3. 평가

과거 『강농기(江濃記)』, 『아자이 삼대기(浅井三代記)』 등의 기록에서는 아버지 아자이 스케마사와 비교하며 히사마사를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롯카쿠 씨에게 복속한 점이나 무용(武勇)이 부족했다는 점이 주된 이유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내정 및 영토 경영 능력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외교 정책에 대해서도 재검토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3. 1. 부정적 평가

1553년(덴분 22년) 롯카쿠 요시카타에게 패배한 이후, 아자이 히사마사는 롯카쿠 가문에 복속하는 처지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히사마사가 이후에도 가신들에게 지행(知行)을 나눠주는 문서(완행장)를 계속 발급한 반면, 롯카쿠 요시카타는 고호쿠(江北) 지역 무사들에게 지행 문서를 거의 발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를 완전한 신종(臣従) 관계로 보기는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이는 고호쿠 지역이 롯카쿠 가문의 영토로 완전히 편입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역사학자 오와다 테츠오는 이러한 상황, 즉 아자이 가문이 독립성은 유지하면서도 롯카쿠 가문의 강한 통제 하에 놓인 상태를 '롯카쿠 씨 보호국'에 비유하며, 당시 아자이 가문의 약화된 위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했다.

3. 2. 긍정적 평가

아자이 히사마사는 아버지 료세이 시대에 국인 영주들의 맹주 지위를 얻은 것을 바탕으로, 국인 및 토호와의 주종 관계를 확립하여 센고쿠 다이묘로서 아자이 가문의 기반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단순한 상대적 우위를 넘어 절대적인 상하 관계로 전환시킨 중요한 성과로 여겨진다.

히사마사는 특히 재지 영주들 사이의 분쟁에서 '조정자' 역할을 수행하며 영향력을 확대했다. 여러 차례 용수 논쟁을 중재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이는 당시 농업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 해결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덴분 24년(1555년)에는 '우물 봉행'이라는 직책을 신설하고, 12개 마을이 얽힌 대규모 물 분쟁을 성공적으로 해결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은 영지 내 질서를 유지하고 백성들의 생활 안정에 기여한 것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당시 오다니 성 기슭 마을의 심각한 물 부족 문제 해결을 위해 힘 있는 호족인 이구치 씨에게 압력을 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3]

용수 문제 외에도 다양한 상론(소송)에 대해 당사자들을 오다니 성으로 불러 재판을 진행했다. 초기에는 아버지 료세이 시대의 선례를 따랐으나, 점차 독자적인 기준인 '아자이 씨의 논리'를 확립해 나갔다고 분석된다.

또한, 오다니 성 내에 육방(六坊, 6개 사찰의 출장소)을 건설하고 사찰에 대한 정책을 시행했으며, 성 자체의 증축과 토루 건설을 통해 방어력을 강화하는 등 내정 정비에도 힘썼다. 특히 덴분 22년(1553년)에는 아버지 료세이의 덕정을 발전시켜 23개 조항으로 구성된 법 제도를 도입했다. 이는 연공 납부 시기를 조정하여 채권자의 이익을 보호하는 등 기존 제도를 개선한 것으로, 아자이 가문의 통치 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4. 가족 관계


  • 아버지: 아자이 료세이
  • 어머니: 아코 씨(馨庵寿松)
  • 정실: 아고고료(오노도노) - 이구치 엣젠노카미 쓰네모토의 딸. 『아자이 삼대기』에는 이구치 단조쇼키치 요시우지가 지토 산에서 료세이를 대신해 죽었기 때문에 그의 딸을 히사마사의 부인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 * 아들: 나가마사(사루야샤, 신쿠로) (1545-1573)
  • 생모 불명의 자녀
  • * 딸: 요후쿠인(교고쿠 마리아) (1543-1618) - 교고쿠 다카요시의 부인
  • 같은 어머니를 둔 형제자매
  • * 누나 또는 여동생: 쥬케이 - 아자이 다다요시의 부인
  • 의붓어머니 (아버지 료세이의 정실): 구라야 - 아자이 나오마사의 딸
  • 이복 형제자매
  • * 누나 또는 여동생: 쓰루치요(가이쓰도노)
  • * 형 또는 동생: 마사히로(신시로)
  • 생모 불명의 형제자매
  • * 누나 또는 여동생: 쇼이치고료 - 미타무라 사다요시의 부인
  • * 형 또는 동생: 토라야샤(야마시로노카미)
  • 기타
  • * 의붓 형제 (쓰루치요의 남편): 아키마사(신사부로) - 다야 씨로부터 온 데릴사위


사이토 요시타츠의 부인이 히사마사의 딸 등 아자이 가문 출신이라는 설도 있으나, 『동아자이 군지』는 『에고키』와 『겐쓰기쿄키』의 기록을 근거로 요시타츠의 부인이 이치조 씨 출신이라고 보아 이 설을 부정한다.

또한, 지쓰사이인(나가하마시 히라쓰카초)을 창건한 쇼안겐큐젠니가 히사마사의 딸이라는 사찰 전승이 있다. 그러나 지쓰사이인의 과거장에 따르면 그녀는 덴쇼 13년(1585년) 6월 29일에 49세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출생 연도는 덴분 6년(1537년)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히사마사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동아자이 군지』는 쇼안겐큐젠니가 히사마사보다는 아버지 료세이의 딸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지적한다.[4]

5. 관련 작품


  • 오이치노카타 (1942년, 배우: 아라키 시노부)
  • 도쿠가와 이에야스 (1964년, TV 아사히, 배우: 가토 요시)
  • 전국 염화 이야기 (1969년, TBS, 배우: 나카무라 간에몬)
  • 국토 이야기 (1973년, NHK, 배우: 군지 료)
  • 황금의 나날 (1978년, NHK, 배우: 마스다 준지)
  • 오이치 고료닌 (1989년, NHK, 배우: 나카야 노보루)
  • 오다 노부나가 (1989년, TBS, 배우: 단바 테츠로)
  • 노부나가 KING OF ZIPANGU (1992년, NHK, 배우: 테라다 미노리)
  • 오다 노부나가 (1994년, TV 도쿄, 배우: 다키타 유스케)
  • 도요토미 히데요시 천하를 얻다! (1995년, TV 도쿄, 배우: 다나카 히로시)
  • 히데요시 (1996년, NHK, 배우: 우메노 야스미)
  • 공명이 갈림길 (2006년, NHK, 배우: 야마모토 케이)
  • 전국 질풍전 두 명의 군사 히데요시에게 천하를 얻게 한 남자들 (2011년, TV 도쿄, 배우: 시미즈 고지)
  • 고 ~공주들의 전국~ (2011년, NHK, 배우: 테라다 미노리)
  • 여성 노부나가 (2013년, 후지 TV, 배우: 야마지 가즈히로)
  • 노부나가 콘체르토 (2014년, 후지 TV, 배우: 무라이 구니오)

참조

[1] 웹사이트 朝日日本歴史人物事典「浅井久政」の解説 https://kotobank.jp/[...] kotobank 2021-11-25
[2] 서적 『系図纂要』
[3] 문서
[4] 웹사이트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https://dl.ndl.go.jp[...] 2024-04-1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